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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린의 천재 파가니니

행복 팡팡 2017. 9. 2.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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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린의 천재 파가니니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영화 "파가니니: 악마의 피아니스트" 를 보며 파가니니는 정말 대단한 바이올린의 천재라고 느꼈습니다. 유럽 여성들의 마음을 거머쥔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는 묘한 외모와 화려한 바이올린 연주 기법으로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숨을 멎게 만드는 예술가입니다. 파가니니는 명성 보다는 방탕한 생활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에게 어느 날 우르바니라는 인물이 나타나 달콤한 제안을 하게 됩니다.

“당신은 좋아하는 연주를 미친 듯하면 되오.
난 이 순간부터 당신을 주인으로 모시고 수족이 되어 몸 바쳐 일하겠습니다”


우르바니의 도움으로 파가니니는 곧 유럽의 가장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었고
지휘자 왓슨에 의해 런던의 단독 콘서트에 초청받게 됩니다.
런던에 도착한 파가니니는 왓슨의 딸 샬롯을 보는 순간 마음을 빼앗기게 됩니다.
하지만, 우르바니는 이 둘의 관계를 이용해 스캔들을 만들어 명성을 얻고자 합니다. 


“어떤 이는 그를 마법사라 했고, 또 다른 이는 악마라 했으며,
그나마 정상적인 이들은 그를 유령이라고 불렀다.”
-니콜로 파가니니에 대한 1824년 제노바 신문 기사 발췌-


니콜로 파가니니 [Niccolo Paganini 1782.10.27~1840.05.27]

1782.10.27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태어났습니다.

1794년
11살 때 첫 공개 무대에 데뷔하여 큰 성공을 거둡니다. 이후 6년간 아버지의 엄격한 관리를 받으며 제노바를 시작으로 이어진 여러 콘서트 일정에 맞추어 매일 10시간 이상씩 연습을 했답니다.

1801년
마침내 19살 때 그렇게 원하던 아버지로부터 독립을 이룬루며 뛰어난 재능으로 대단한 찬사를 들었던 파가니니는 가족으로부터의 첫 해방과 함께 도박에 빠지는 등 위험하고 모험적인 삶의 유혹에 빠져듭니다.

 “마침내 자신의 주인이 되었을 때 나는 심한 고갈 속에서 삶의 기쁨을 느꼈다.”라고 말했답니다.


1805~1809년
나폴레옹 여동생인 엘리자 보나파르트(Elisa Bonaparte, 1777~1820)에 의해 궁정 독주 연주자로 임명되었습니다.

1820~1835년
파가니니는 연주회 개런티를 다른 사람들의 곱절 이상으로 받았고, 티켓은 순식간에 매진되었습니다. 그것은 파가니니가 바이올린이 도달할 수 있는 테크닉의 극한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너무 훌륭한 바이올린 연주에 사람들은 자신들의 귀를 의심할 정도였습니다. 파가니니가 파우스트처럼 악마에게 자신의 영혼을 팔아넘겼고, 그 대가로 마술 같은 바이올린 솜씨를 갖추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등장했으나 그것은 파가니니의 천재성과 더불어 하루도 빠짐없이 연습한 노력의 대가인 것입니다.


1840년
파가니니는 제노바에 잠시 머물다가 니스로 옮겼고, 이후 그의 건강은 손쓸 수 없이 나빠졌습니다. 평생을 괴소문에 시달렸던 파가니니는 죽을 때까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는 소문 탓에 자신이 원했던 고향 땅에 묻히지 못한 채 불행하게 삶을 마감했다니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이렇듯 파가니니의 천재성을 영화로 나타내기는 정말 어려웠을 것입니다.

세계가 인정한 마에스트로 천재 바이올리니스트인 데이비드 가렛이 파가니니의 모습으로 등장하였으며 뛰어난 바이올린 연주 솜씨로 영화를 이끌어 갑니다.


데이비드 가렛은 1980년에 태어났으며 4살에 바이올린을 시작해 ‘바이올린 신동’으로 불리었답니다. 10세에 무대 데뷔, 13세에 세계적인 지휘자 주빈 메타와의 협연하는 등 거장들과 함께 무대에 오르며 주목을 받았다니 파가니니만큼 대단한 예술가입니다. 이후 1999년에 뉴욕으로 건너가 세계 5대 음악학교 중 한 곳으로 손꼽히는 명문학교 줄리아드 스쿨(The Juilliard School)에서 음악학과 작곡을 배웠다고 합니다. 데이비드 가렛은 줄리아드 스쿨에서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이자크 펄만(Itzhak Perlmann)을 사사했습니다. 2003년에는 줄리아드 스쿨 내의 작곡 경연에서 입상하기도 했습니다. 2006년 본격적으로 크로스오버 뮤지션으로서 활동을 시작한 데이비드 가렛은 2008년 에코 클래식(ECHO Klassik)에서 ‘Classic Without Borders’를 수상했답니다. 그는 팝, 록, R&B는 물론 라틴음악에까지 이르는 다양한 장르를 커버함으로써 그의 천재성을 다시 한번 보여주었답니다.

 '크로스오버계의 슈퍼스타'라는 또다른 이름까지 얻게 되었고 누구보다 뛰어난 재능과 보증된 흥행력을 가지고 있는 천재 바이올리니스트입니다.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데이비드 가렛의 완벽한 싱크로율!
외모, 음악성, 연기 모든 것을 갖춘 최고의 캐스팅!

이 시대의 가장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로 손꼽히는 데이비드 가렛은 <파가니니: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를 통해 연기에 처음 입문하는 기회를 얻게 되었으니 그 또한 영광일 것입니다.

모든 남자가 증오했고, 모든 여자가 사랑했던 ‘니콜로 파가니니’!
영화 속의 인물 파가니니에서 나와 실존 인물 파가니니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니콜로 파가니니(Niccolò Paganini)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태어난 바이올린 연주자이며 작곡가입니다.

어린나이에 이미 종전의 연주 기법의 대부분을 마스터한 파가니니는 15세가 되자 하루 10시간 이상의 격심한 연습으로 혼자서 새로운 연주기법을 습득해 나갔다고 합니다. 그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17세에 북이탈리아 지방에서 열광적인 환영을 받아 곧 명성과 부(富)에 휩싸이게 되었답니다. 그러나 급속한 성공으로 자만에 빠진 소년 파가니니는 방탕과 도박에 빠져 건강을 해치고 거액의 빚을 져서 결국 연주에 필요한 바이올린마저 잃게 되는 파국에 이르게 되엇습니다. 또 귀부인과 토스카나에 있는 그녀의 성에서 동거 생활을 보냈으나 그 동안 연주회를 열지 않았기 때문에 애인 살해죄로 투옥되었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하였답니다. 하지만 사실 이 때에 건강 회복을 기도하면서 하모닉스나 중음주법, 스타카토 등의 새로운 주법을 개척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26세 때부터 46세까지 20년간에 걸쳐 이탈리아 각지로 연주 여행을 하였으며 종전의 바이올린 개념을 훨씬 초월한 입신(入神)의 기(技)를 펴냈고 청중에게 큰 감명을 주었답니다. 그 묘기는 이탈리아 이외의 각지로 퍼져나가 파가니니의 이름은 온 유럽 음악 애호가들의 입에 존경하는 마음으로 오르내리게 되었습니다. 만년에는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왕복하면서 연주 활동을 하는 한편 프랑스의 악보 출판상에 자작의 작품을 출판하려고 했으나 파가니니가 요구하는 인세가 너무 높아 출판은 진척이 안되었고, 결국 파가니니의 생전에 출판된 작품은 극히 적습니다. 출판된 작품이 적은 것은 파가니니가 자기 연주 기법이 공개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고도 합니다. 파가니니는 신진 작곡가로 세상의 주목을 끈 베를리오즈를 파리에서 만나 자신의 비올라를 위한 비올라 협주곡의 작곡을 의뢰하기도 했으며 완성된 작품은 파가니니의 기대만큼 비올라의 역할을 화려하게 다루지 않았으므로 마음에 들지 않아 파가니니는 이를 "이탈리아의 하롤드"로 발표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하고 합니다. 파가니니의 건강은 좋지 않아 연주 활동도 뜸해져 1840년 인후 결핵으로 남프랑스의 니스에서 57세로 일생을 마쳤습니다.

 

파가니니의 악기 연주기법은 신의 경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파가니니는 4옥타브에 걸치는 넓은 음역을 자유자재로 구사했으며 음을 하나하나 끊어 연주하는 스타카토 주법, 현을 손끝으로 튕겨서 소리를 내는 피치카토 주법 현에 손가락을 가만히 대서 휘바람 같은 소리를 내는 하모닉스, 이중 트릴 (떨꾸밈음)등의 화려한 연주 기법을 만들어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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